그 마왕의 심장에 칼을 꽂아넣고 돌아온다면, 세계는 당신으로 하여금 비로소 완전한 평화를 되찾을 거라고요.
어릴 적에는 당신에게만 주어지는 그 막중한 의무가 두려웠던 적도 있겠지만, 당신은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 속에 길러졌습니다.
그것을 배반할 수는 없겠지요.
이 날을 위해 수련도 열심히 해왔습니다.
새삼 다짐합니다, 새계를 위해.
레오:(화려한 실내를 둘러본다. 역시나 익숙해지지 않는다. 사치라니까... 억지로 이런저런 선물들을 보내오던 얼굴 모를 사람들을 떠올렸다. 성년이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최근들어서 더욱 심해졌더랬지. 손끝으로 훑으면 금방이라도 금박이 묻어날 것 같은 탁자를 쓸어보았다.) 이렇게 완벽한 하루의 시작도 없던데... (인간이란 자못, 그럴수록 불안해지는 생물이다.)
레오:(...이곳에 와본 적이 있었던 걸까. 하지만 기억에 없다. 내내 느껴지던 묘한 기시감을 결국 무시하지 못하고 문으로 다가간다. 나갈 수 있을까.)
고풍스런 나무 문에 다가갑니다.
바깥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네요.
레오:(문을 열고 나가보자.)
문을 열기를 시도해보면, 잠겨있지 않아 손쉽게 열립니다.
문 바깥으로 나서면, 여전히 하얗게 일렁이는 천장.
높게 솟은 성채의 뾰족한 지붕은 마법처럼 투명하여 눈 안에서 붉은 햇살로 반짝거리고, 성 안은 마치 거대한 온실 같습니다.
여름 햇볕 안에 들어와 있는 마냥 따스하고 안온했습니다.
가운데가 뻥 뚫려 난간에서 홀을 내다볼 수 있는 구조로 중앙 홀은 그 가운데 꽃마저 드문드문 화려하게 피어 있습니다.
당신은 불현듯 정신을 잃기 전에 보았던 흉흉한 마왕성을 떠올렸습니다.
어쩌면 마왕에게 잡혀온 것일지도 몰랐는데... 멍한 채로 당신은 발걸음을 옮깁니다.
잘못 찾아온 것일까요? 혹은 죽어가는 이의 마지막 꿈 속일까요?
선한 누군가가 당신을 이곳까지 옮겨다준 걸까요? 아니면 이조차 마왕의 술수일까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때입니다.
나타샤:레오.
산들바람과 함께 슬며시 꽂히는, 호명하는 목소리.
고개를 들면..
짙지도 밝지도 않게 물결처럼 일렁이는 긴 머리칼과,
살짝 휘어져 새까만 흑단의 눈동자.
기다랗다는 인상이 느껴지는...
마왕, 나타샤가 서 있습니다.
어쩐지 마왕...이라고는 단숨에 알아채기 어려운 모습입니다.
황성의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두려워하듯 이마에 난 뿔도,
뒤집어쓴 새카만 망토도, 박쥐의 것 같은 날개도 없습니다.
사실적인 기법으로 그려진 마왕의 초상화에서 보았던 짧은 머리도 아닙니다.
마주치고서 영원처럼 굳었던 당신.
순간 말이 없습니다.
침묵을 깬 것은 당신의 앞에 선 그입니다.
나타샤:놀랐어?
그래, 내가 마왕, 나타샤야.
그렇게 말하는 마왕은 당신을 보며 어쩐지, 조금 웃고 있습니다.
레오:(사악한 기운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밝고도 평화로운. 그리고 깨끗한 마왕성의 모습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 이 성의 주인 마저 제가 알고 있던 모습과 다르게 평범한 인간과 같은 외모로 저를 맞이하자 입만 벙긋거렸다.)
...마왕? (말도 안된다는 투.)
나타샤:왜 그런 말투야? (계단 위에서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곧게 걸어오더니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멈춘다. 입꼬리가 오르긴 했으나, 뭔가 만족스럽지 못한 것처럼 저 혼자 팔짱을 낀다.)
마왕 처음 봐? 아, 물론 그러시겠지. 뭘 물을지 맞춰볼까. 뿔은 왜 없냐느니, 뭐 그런 것들. (으쓱,) 뿔 수납형이야. 꺼내두면 힘이 너무 빠져서.
질문할거 또 있냐? (어쩐지 몰아치듯 말을 꺼내더니 가만히 바라본다.)
레오:수납형... ... (그런 편리한 기능이였냐는 눈으로 바라본다. 마왕과 질의응답을 주고받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를 이곳에 데리고 온 게... 당신? 기절했던 것 같거든. (와중에 멋쩍다는 듯 뒷목을 긁적이기까지 했다.)
나타샤:웃긴 표정 하기는... (작게 킬킬 웃으면서 또 한 발자국 다가와, 거리를 좀 더 가까이 한다. 서슴없는 행동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깜찍한 깜장 마물들이 데려와줬지. 내가 시켰어. 아무런 재미도 보지 못하고 그냥 시체로 남겨둘 수는 없잖아, 그 '용사' 를.
좀 꼴사납긴 했는데? 몸 좋더라. 좋은 구경이었어.
레오:... ... ... ... (조신한 척 제 옷이나 갈무리한다. 시뻘개지는 귓바퀴.) 문란하기 짝이 없는 행동들을 한다더니 역시... (그런 발언.)
재미를 본다는 말은 역시 그런 건가....
나타샤:(결국 못참고 큰 웃음소리를 한참 흘리다가 거의 눈물까지 흘릴 것처럼 눈가를 붉히고 몸을 잘게 떨었다. 고상하고 싸늘하게 생긴 인상 치고는 상당히 과격한 몸짓이었다. 장갑으로 덮힌 마릇한 손을 들어 네 어깨에 두고는 검지로 톡, 톡 느리게 건드린다...) 아~ 아...
역시 바깥에서 죽게 놔뒀으면 재미없을 뻔 했잖아. 역시 나타샤... 뭘 좀 안다니까.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 한 번도 안 해봤어? 안 해봤겠네. 체력 좀 돌아왔으면 재미 좀 같이 볼까, 레오?
레오:(외설스럽기 짝이 없는 발언에 동정 용사-신관에게 길러진-는 입을 쩍 벌리고 마는데...)
...정기를 빨아먹을 심산이지...
(상상 속의 고아하고도 강압적인 마왕과는 굉장히 다른, ...어딘가 친근하고도 평범한 대화가 이어지자 처음의 긴장이 풀린듯 저도 따라 푸슬푸슬 웃음을 흘리고 만다.)
나타샤:입에 주먹 들어가겠다, 얌마. (씨익 웃는 낯으로 마주하면서,) 뭐... 정기 빨리고 싶으면 빨아주고... 근데 그런 너덜한 꼴이면 힘도 제대로 못쓰지 않을까 싶어서 지금 당장은 좀.
이번 용사는 못쓰겠네. 뭐가 좋다고 벌써 개처럼 웃고 그래. 나 이래뵈어도 마왕이고 너덜한 용사 정도는 슥삭 할 수 있다? (네가 다쳤던 부분의 옆구리를 왼손으로 콕 찌른다.)
레오:(지금 당장은 좀, 이라는 건... 나중에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평소보다 더 열심히 아랫도리를 씻어야겠단 생각이나 하고 있다. 쿡, 옆구리가 찔리는 벌을 받고 몸을 움츠렸지만. 다 낫지 않은 건지 알싸한 통증에 눈가를 움찔했다.) 그래도 말하는 걸 보니까 내 아랫도리만 보고 살려준 건 아닌가봐... 몸이 좋아 살아남은 용사 같은 타이틀은 쪽팔려서 어디다 내놓지도 못할 뻔 했는데.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끙...)
나타샤:(대충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다 꿰고 있는... 독심술사의 표정으로 레오 앞에서 킬킬댐...) 응? 무슨 소리야? 몸만 좀 덜 좋았어도 그대로 마물 밥으로 내줬을걸?
좀 더 부끄러워하라고 하는 소리 맞아. 너는 귀까지 빨개질 때가 제일 깜찍하니까. (어깨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스윽, 넘기고 크리스탈로 된 창문 너머를 흘깃 본다.)
힘 쓰려면 역시 든든하게 밥을 먹어야 하지 않겠어.. 암, 그렇고말고.
밥 먹자. 용사. 마지막 만찬 같아서 좋잖아.
레오:꼭 내가 민망해하는 꼴을 자주 본 적 있는 사람처럼 말하네... (의아함에 갸우뚱 하던 것도 잠시. 마지막 만찬이라는 단어에 풀어졌던 긴장이 되살아난다. 결국 죽... 여아하는 걸까. 어느 한 쪽을.)
... 만찬 전에 하나, 궁금한게 있어.
나타샤:아, 그거 말이지. (검회색의 눈동자를 시큰둥한 반응으로 가볍게 마주하면서 마저 말을 잇는다.) 내 방에 거울이 하나 있는데 그걸로 웬만한 풍경은 다 보이거든. 뭐든 물어봐~ 어차피 내일이면 넌 죽은 목숨일텐데, 내 속옷 색까지도 답해줄 수 있으니까.
레오:(지켜... 봤다는 건가. 괜히 다시 민망해졌다.) 무슨 색의 속옷을 입고 있는 지 묻는 것도 좋지만... (새카만 시선을 마주한다. 이 색만큼은 밖에서 본 마왕성의 그것과 묘하게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당신의 적이 맞아?
나타샤:진심이냐. (깔깔거리며 웃던 경박한 웃음소리가, 다음의 문장을 듣고 차차 줄어든다. 뚝 그쳐 정적만이 남은 성내에는 바람 소리마저 멈추어 이명이 들릴 만큼 고요해진다. 왜 그런 것을 물어? 하고 대신 말하듯 표정이 일그러졌으나, 그 일그러짐의 의미가 어떠한 방향인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럼. 우리가 친구 놀이라도 하는 사이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마왕과 용사, 우리는 나기를 대립으로 태어났잖아. 이런 것도 안 가르치고.. 황성도 다 썩었네. (끌끌, 혀를 차고는 말의 마무리처럼 가볍게 네 멱살을 쥐었다. 가느다란 팔이다.)
굳이 싸워서 증명해줘야 알아먹겠냐고.. (과하게 반응하고는 멱살 쥔 손을 팍 내려 콱콱 걸어가버린다. 뭐해! 안 따라오고! 하는 외침은 덤.)
레오:아니... ... (보통 죽어가는 적을 살려서 데려오고, 치료해주고, 농담 따먹기를 하며 밥까지 차려주지는 않으니까... ... 변명처럼 중얼거리며 쭐래쭐래 뒤따라간다. 멱살 잡혔던 옷깃이 딱 네 주먹 크기만큼 구겨져 자국이 남았다.)
태어난 순간 적으로 태어나는 것도 좀... (기구하지 않나... 제국에서 알면 혀를 차며 비난하고도 남을 소리를 용사란 신분으로 떠들었다. 용사답지 못했다.)
당신의 의문은 타당하나, 등짝을 훤히 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씩씩대며 걸어가는 마왕의 뒷모습은 답해줄 생각이 없어보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나요? 문득 본 크리스탈 창 너머는 노을도 다 진 어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왕, 그러니까 나타샤는 그렇게 당신을 다이닝 룸으로 인도하고...
눈앞에 펼쳐진 화려한 성찬을 보며 당신은 놀라움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여야 할 상대와 이런 진수성찬을, 사이좋게 식사라니요!
다양한 고기를 주로 한, 길쭉하고 고아한 느낌의 상이 부러지도록 차려진 성찬입니다.
보통의 성인 두 사람이 먹기엔 많아보이는 양이지만...
당신이라면 충분히 해치울 수 있어보입니다.
나타샤:(두 의자 중 좀 더 먼 쪽의 의자에 털썩, 앉는다.)
레오:(상다리가 휘어질듯한 성찬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직접 준비한 거야? (마왕이? 요리를? 재료는? 삐그덕삐그덕, 남은 의자에 착석했다.)
마왕이 뭘 또 그런걸 묻냐는 표정으로 나이프를 듭니다.
물론 그것으로 당신을 공격하지는 않고.. 가까이 있던 큼직한 닭 통구이에 꽂았지만요.
나타샤:마왕한테도 취미라는게 있단 말이지. 잘 알아둬, 저승 가면 신한테 마왕의 실태에 대해 이야기도 좀 해주고.
(쳡쳡)
레오:대체 왜 마왕인 건지... ... (누가 처음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을까. 음식을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도 손에 꼽는 일이다. 미묘하게 남아있는 어색한 분위기에 식기를 달그락, 거리다가 손에 쥐곤 가장 근처의 스프를 떠먹기 시작한다. 맛은...)
맛은...
...훌륭합니다.
뭐지? 이 마왕 뭐지?
그러고보니 직접 차렸다는 말은 안 했지만, 딱히 사용인들도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주방에 들어가 레시피를 훔치고 싶을 정도의 맛이네요.
묘하게 정성과 손맛이 서려있다고 해야하나... 황성의 진수성찬에 감히 비해질 맛입니다.
나타샤:맛있지? 맛있다고 말해. (샐러드를 크게 퍼 접시에 담고는 매운 스프를 한 입 떠마시면서 강요한다...)
레오:... (눈에 이채가 돌더니 한 번 떠먹었던 스프를 허겁지겁 퍼먹기 시작한다.) 당신... 마왕이 아니라 미(味)왕인데 잘못 알려진 거 아냐?!
(나타샤를 힐긋 보더니 저도 샐러드를 가져와 이것도 첩첩...)
나타샤:미왕, 큽... 웃긴다... 그만큼 맛있다는 뜻이겠지? (녀석... 누워있을땐 죽상이더니.. 하며 웅얼거리고는 밥 먹을 때 말하는건 예의가 아니라며 다시 열심히 먹기 시작한다. 상당히 기이한 광경이다.)
상다리 부러질 듯한 만찬이었지만 두 사람의 입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잠깐. 그런데 독이라도 들어있으면 어떡하죠?
음식을 거의 다 비워놓고 생각하는 것도 웃기지만, 마왕이 이렇게 호의적으로 밥을 먹여주는게 정상인가요?
레오:... ... ... (거의 핥아먹은 건가 싶을 정도로 싹싹 비워져 설거지도 필요 없을 것 같은 식기들을 보고 식은땀을 흘린다. 아니겠지... 이 머리로 용사를 한다. 가슴이 웅장해진다.) ... ... 요리... 좋아하는 거지?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독을 넣을리 없다는 기적의 논리를 뇌내에서 펼치는 중)
나타샤:우와... 개(dog)같네. (감탄 맞다. 용사보다 조금 더 이르게 나이프를 내려놓고 와인을 마시던 중에 순수하게 감탄사를 흘려놓고선 질문에 긍정한다.) 말했잖아. 내 취미라고. 이런 곳에서 혼자 살면 이런 취미 하나 정도는 있어야 살만하지 않겠어?
야, 생각해봐... 네가 만약 마왕인데 이 성에 혼자 있어. 그럼 심심하겠지? 용사 이벤트가 두근두근 기다려지겠지? 근데 인간이 나고 자라는건 오래 걸리니까 그동한 할 일이 뭐라도 있어야지 싶지 않냐. (검지와 엄지로 집어올린 와인잔을 천천히 돌린다.)
레오:(맞지... 글치... 하며 고개를 주억이는 사이 독에 대한 걱정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떠오르는 새로운 의문.) .... 죄송하지만 혹시 연배가... ... 대체 몇 명의 용사가 거쳐간 거야?
밖으로 나가고 싶었을 것 같은데. ... 역시 날 때부터 이렇게 살았다고 할 거지. (흐리게 웃었다. 비슷했다.)
나타샤:... (용사 보면서 너도 참... 멍청하구나.. 하는 생각을 노골적으로 얼굴에 드러냄...) 글쎄. 하나, 둘, 석삼, 너구리~ ... 기억 안 나. 암만 마왕이라지만 기억력이 평생 가는건 또 아니라서?
네가 여태껏 몇 번 밥을 먹었는지 넌 알 수 있겠냐? 그런 거야. 묻지 마. (흥!
..그렇다고 네게 내 입장의 완전한 이해를 바란 건 아니야. 멋대로 공감하려 들지는 마라, 그건 그거대로 기분 나쁘니까. 난 잘 살고 있어. (흐린 웃음에 고개를 돌려 시야에서 치운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레오:(공감과 이해가 기분 나쁘다는 이야기에 뒷목을 슥 쓸어내렸다가, 그래. 하는 짧은 반응으로 끝냈다. 주제 넘었나.) 그럼... 이제 밥도 먹였고. 날 구워 삶아드쇼, 하며 기다리면 되는 타이밍인가. 도망쳐야하는 타이밍인가. (이걸 말로 한다.)
(여기까지 와서야... 서로 죽이는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아졌다.)
나타샤:도망 못 칠걸? 물론 한다면 얼마든 너한테 칼을 들이밀 수 있겠지만, 나는 정정당당한 걸 좋아하거든.
레오:(멀리 보이는 숲의 정경을 가만히 바라본다. 전부 다 지켜볼 수 있었겠구나. 근방이라면. 무심코 고개를 돌려 나타샤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나타샤:(당신에게 한 치의 관심도 주지 않고 그저 난간을 붙잡은 채 저 멀리의 무언가를 보는 시선이다. 등을 돌리고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은 채로 흩날리는 길고 긴 머리카락과 하얀 등, 펄럭이는 치맛자락만이 고요하게 어둠을 가른다.)
그래.. 이쯤 되었으면 한 번은 물어야지. 용사로 태어나서 마왕을 만나게 된 소감은, 어때?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가벼운 목소리를 던진다.)
레오:...왜 용사고 왜 마왕이었는지 모르겠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어떤 형태로든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기 때문일까.) 내내 의문뿐이었는데. 이곳에 도착하고 난 후에도 변하는 건 그다지 없었네.
나타샤:음. (그 대답과, 낮은 목소리를 마치 노래라도 듣는 것처럼 잠시 음미하다가 몸을 빙글, 돌려 난간에 몸을 기대어보인다.)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우리 용사님은. 하지만 그 의문들이 꼭 풀려야 할까? 어차피 둘 중 하나는 없어야 할 운명이잖아. 네가 마왕이고 내가 용사였더라도 똑같았을 테지... 그냥 그런 거야. 의미를 찾으려 들면 머리만 아프게 되지 않겠어.
굳이 답을 구하자면, 네가 성력을 가졌고 나는 마왕의 자리에 앉았다~ 정도지. 레오 너 어차피 머리 쓰는 것도 잘 못할 것 같이 생겼는데 그냥 받아들이는게 어때?
레오:(바로 봤네. 하며 실 없이 웃었다. 머리 아픈 일의 해답은 늘 몰랐고, 단순함이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날 때부터 그리 태어났으니 의문만 품었을 뿐 반항과 거부 한 번 해볼 생각 없었던 거겠지. 그래, 꼭...) 톱니바퀴처럼... 말야. 당신에게 이런 말 하는 것도 우습지만, 그렇다면 우린 이가 맞아 돌아가고 있는 중인 걸까... ...
나타샤:그걸 묻는다면, 그것에 대해선 답을 해줄 수 있어. (씨익 웃지만 후련한 느낌은 없이 어딘가 찜찜한 잔상을 남긴다. 난간에 기댄 몸의 중심과 고개를 뒤로 기울이자 난간 너머 허공으로 물결이 친다.)
우린 아주 잘 돌아가고 있는 훌륭한 톱니바퀴야! 그것만큼은 부정하지 않아도 돼. 적어도 네가 용사고, 내가 마왕인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불변하지 않는 진실이지.
그리고 당신이 아니라 난 나타샤야. 알면서.
레오:... 마왕이라고 부르도록 교육받았는데, 직접 마주한 순간 그렇게 부를 마음이 사라진 거 있지. 그렇다고 이름을 부르는 건... 낯간지럽잖아. (어깨를 으쓱. 허락해줬으니 이제는 그리 부르겠지만.)
나타샤, 우린... 훌륭한 톱니바퀴라는 사실에 기뻐해야하는 걸까. (잘 모르겠다는 낯짝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대답을 바라고 한 소리는 아니었지.)
나타샤:마왕이 주는거 덥석덥석 집어먹지 말라는 교육은 안 받았고? (난간 너머로 넘어갈 듯 기울였던 몸을 읏챠, 하는 소리와 함께 일으켜 네게 또각또각 다가온다. 첫 대면의 때처럼 두 걸음 정도를 남기고 어깨를 툭툭 쳤다.)
너 어차피 내일 내 손에 죽을 건데 마왕 이름이라도 좀 무례하게 불러보면 덧나냐. (무슨 확신인지는 몰라도 미소짓는 낯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 그렇게 잘만 부르면서...
부정하지 않아도 될 뿐이지, 기뻐하고 말고는 레오 네 의지인데도. 음...
(가느다란 손가락이 어깨에서 네 목을 타고, 슬금 올라서서 귀 언저리를 간질하게 맴돈다. 노란 머리카락을 귀 뒤에 슬쩍 넘겨주었다.)
레오:나서부터 배워왔던 모든 것들을 하나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중이거든. (귓가를 어루는 손길에 고개가 슬며시 기울었다.) ...간지러워. (다만 밀어내는 일은 없었다.)
제법 확신에 차 있는 걸... 보통 이야기에서는 용사가 마왕을 쓰러트리는 결말이던데 말이야. 조금 겁을 먹고 있는 게 좋으려나... (농담 같이 이야기하며 끌끌, 낮은 웃음을 흘렸다.)
나타샤:무능한 용사와 가사에 능한 마왕의 이야기라면 좀 다를 수 있지 않을까? (무난한 멜로디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저 모든 것이 진심이 아닌 것처럼, 네 하얀 목에 한 손을 가만히 얹어 손가락 하나하나 흘러내려온다. 별이 쏟아질 것 같은 하늘 아래에서 잠시간 그렇게 마주보다가, 낮은 웃음에 저도 친근한 웃음소리를 내어주고는 한 발 물러선다.)
슬슬... 피곤할 시간이지? 방으로 돌아가는게 좋겠어. 승부는 내일로 보고.
그의 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현실성이 없습니다.
이 순간에 당신이 피로할 수 있다는 것도,
돌아갈 방이 있다는 것도,
마왕이라는 자와 정당한 승부를 겨룰 수 있다는 것조차.
마왕은, 나타샤는 당신을 친절하게 아까의 그 방으로 안내해줍니다.
조금 삐걱이지만 여전히 푹신한 침대에 다시 눕습니다.
용사는 무슨 생각을 하나요?
레오:(황성에 있던 자신의 방보다는 초라하지만, 오히려 그것에서 안정감을 느꼈다. 마왕의 성인데도 불구하고. 우스운 일이다. 훌륭한 톱니바퀴. 그녀의 말이 맴돌았다. 내일이면 그 의무를 다하게 될까. ...기쁜 일일까. 온갖 잡념으로 가득찬 밤이었다.)
잡념으로 가득 차, 도무지 잠이 오질 않습니다.
그렇잖아요, 마왕의 소굴에서 편안하게 잠이 드는 용사라니.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살짝 엄습해오는 것과 함께,
마왕이 이상하게도 친숙한, 그러니까 꼭……
황성의 이들이 말하는 것과 달리 그들과 똑같은 사람에 불과한 것 같다는 느낌이 차오릅니다.
……아뇨, 이럴 수는 없어요. 이런 건 있을 수 없어요.
당신은 그를 죽이기 위해서만 살아왔습니다.
그것만이 당신 생의 의미이자 목표이자 가치였는데.
마왕이 저런 사람이라면, 저토록 인간적이라면,
그리고 스스로와 용사를 톱니바퀴라 칭하는 생명체라면,
그리하여 당신의 '마왕'에서 벗어나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그저 먼 길을 한 명의 살인자가 되기 위해 온 셈입니다.
...
불안이 몰려옵니다.
당신이 잠이 든 도중에 칼을 찌르러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그가 숨기고 있는 방과, 무언가... 자신만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의 머릿맡에는 성냥과 등잔이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레오:(자신의 존재의의가 무엇이 되었든 괘념치 않는 삶에 익숙해졌다. 다만 그것이 살인자로서의 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평범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고, 개구진 농담을 주고받을 줄 알며, 분홍빛 장미꽃과 미치도록 어울리는... ...)
(성냥으로 등잔에 불을 밝혔다. 끝이 목전에 닿아있더라도 확인하고픈 마음이 있었다.)
용사는 처음으로 남이 그려준 길이 아닌 스스로의 생각에 따라 길을 개쳑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렇게,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인 등잔을 들고서 방을 나섭니다.
....
빛이 가득히 일렁였던 천장은 별빛조차 투과해내지 못하고 검습니다.
이렇게도 다를 수 있는지 의문이 들 만치 암흑으로 뒤덮인 성 안.
홀에 피어있던 꽃향내는 기이한 마법 같고,
어슴푸레한 등불에 그림자가 비치는 것을 보며 당신은 조심조심 복도를 걷습니다.
발소리가 나지 않게, 아주 느리게……,
불빛이 비치는 것은, 당신과 가까운... 아까의 서재 같아보이는 곳과,
문틈으로 촛불처럼 가녀린 빛이 비치는 가장 끝 방입니다.
인기척 없는 서재에 조용히 들어가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레오:(조심히 서재로 들어간다. 여기는... 들키더라도 잠이 안와 책이라도 읽을 요량으로 들어왔다는 변명 정도는 할 수 있을테다.)
그럴듯한 변명을 머릿속에 새겨둔 채 조심히 서재로 들어갑니다.
방금까지도 마왕이 여기에 있었던 듯이 책상 위에 등불이 놓여 있고,
그 위에 무언가 쓰다 만 수첩...? 같은 것이 놓여있습니다.
책장엔 황실의 서재와 비슷하지만 규모가 훨씬 작도록 책들이 빽빽히 꽂혀있습니다.
이것도 취미의 하나일까요?
레오:(제일 먼저 시선이 닿은 곳은 등불이 놓인 책상과, 그 위의 수첩이었다. 살펴보자.)
레오:(냉담한 낯을 마주하자 우뚝 굳었다. 원래 이랬던가? 방 안의 광경을 떠올릴새도 없이 입을 열었다.) ... 목소리가 들려서. (고분고분)
나타샤:... ...마왕이 무슨 말을 하든 네가 알게 뭐야. 너무 사생활을 침해하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들고? 어차피 너... 상태도 개같으니까 푹 자는 편이 나았을 텐데. 응? (옅은 촛불 빛에 창백한 옆얼굴을 비추며, 무언가의 감정을 꾹 누르는 목소리로 쏘아붙인다.)
레오:(날카로운 말들에 멋쩍은 웃음을 내걸었다. 많이 화났나...) 잠이 안 왔거든. 일단은 마왕성이잖아. 여기. ...나 상태 멀쩡한데. (와중에 할 말은 한다.)
나타샤:멀쩡하긴! 성력이니 뭐니 하지만 그걸로 자가치유가 되는 것도 아니고, 너는...! (울컥 목소리의 크기를 키워 더더욱 화를 내다가 제 풀에 지친건지 아니면 경계심도 없는 상대가 그저 한심했던 것인지 말을 말자 하며 고개를 수그린다.) 내가 지금 사악한 마력같은걸로 네 옆구리를 베어도 멀쩡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레오:...왜 화를 내는 거야? 정말 내가 다쳐서 몸이 안 좋다면 나타샤, 네게는 이득일텐데.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화를 내는 모든 말들이... 제 머릿속에서는 걱정과 유사해보였다.) 음... ... 벨 거야? (아닐 걸. 생각했다.)
나타샤:재미가 없잖아, 재미가!! (버럭버럭 외치는 꼴이, 첫인상의 장난스럽고 고고한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고 느껴질 법 하도록 잘게 떨고 있었다. 재미를 논하지만 자기가 한 말을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치를 떨며 머리카락을 정돈한다. 눈이 약하게 충혈이 된 것은 언제부터였는지 용사로써는 알 수 없을 터.)
...왜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표정이야? (부들부들 떨던 주먹을 꾹 쥐고, 아까 네가 다쳤던 그 부분을 치려고 발을 내딛는다. 허접하진 않았지만 빈틈이 많은 속도로.)
근접전(격투)
기준치:
30/15/6
굴림:
64
판정결과:
실패
레오:(발을 딛고, 주먹을 내지를 듯 자세를 취하는 것을 보았음에도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상대를 응시했다. 고목나무처럼.) 진짜로 치면 어쩔 수 없지만... ... (뺨을 긁적. 재미를 논하기에는 여유가 너무 없어 보이잖아.)
나타샤:...봐준 거니까. (가만히 있어도 빗나간 그 행위에, 더 이상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고개를 푹 수그린 채다.)
... ... 해가 뜰 거야.
그 때 진짜 결말을 내지, 용사.
나는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분노 어린 목소리가 내리누르듯 말합니다. 달빛조차 닿지 않는 그믐입니다.
등불의 빛만이 아른거리는 성 안.
이토록 많은 감정이 담긴 목소리를 당신은 들어본 적 있습니까?
고개를 돌립니다. 시선의 방향을 알 수 없습니다.
……지금 당신, 어떤 기분인가요?
레오:(꼭 결말을 내야해? 그 누구도 바라지 않는 것 같은데. 말을 삼켰다. 저는 고작 십여년의 삶이었다지만, 그녀에게는 수 십, 수 백, 어쩌면 수 천년의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멋대로 그만두자 이야기할 정도로 주제넘은 사람이 못 됐다.) ... 그거 다행이다. 나는... ...
모르겠네. 조금 후회할지도. (그러니 시키는 대로 하면 됐다. 주어진 대로. 존재의의를 다 하는 수밖에는...)
나타샤:죽고 나면... 후회도 다 의미 없어지겠지. 그것 참 부럽네. (또, 또 멋대로 이해하려 들 것만 같은 목소리. 그 목소리가 싫다고 말하고 싶었다. 말하지 않았다. 더 이상의 동요를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가. 꺼져버려. 아침이 될 때까지 낯짝 한 번 비추지 마. 멍청하고 바보같은 용사.
레오:... 죽고 싶은 거야? (멍하니 물었다. 의미 없어지는 길을 원해? 무심코 손을 뻗었다가, 허공만 맥 없이 가르고서야 떨어진다.) 가기 전에, 대답... 듣고 싶어.
나타샤:아냐... 그런 거 아니야. 아니라고, 야! (홱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돌리고 노려본다.) 내가 꺼지라고 말했는데 안 꺼져?! 제발 사라져!!! 네가 알 게 뭐야!!!! 한낱 용사 따위가, 네가... 날 죽일 수라도 있을 것처럼 말하면 내가 예, 하고 돌아봐줄줄 알았냐고. 자만이야. 싫어...
(무심코 뻗어진 네 손에 눈길이라도 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듯 아예 눈조차 피해버린다. 성질 급한 마왕은 네가 원하는 대답도 제대로 주지 않고 하이힐이 부서질 것처럼 콱콱 바닥을 밟아 층계를 올라서는 뒷모습만 보였다. 어둠에 묻히고, 빠르게 흩날리는 파란 머리카락까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는 정적만 남는다.)
레오:(고요 속에 홀로 남겨지자 그제서야 시선을 땅으로 처박는다. 자만이라니. 그런 거 아냐. 나는 그다지 죽고 싶지 않았기에, ... ... 네가 죽고 싶다면 이유 모르게 슬플 것 같아 물었다. 괴로운가 싶어 물었다.)
(긴 한숨을 한 번 내뱉고, 이제는 주인이 사라진 끝 방쪽으로 시선을 한 번 던졌다.)
(네가 적은 글씨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대척점에 서서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어쩌면, 한 쪽이 일방적으로 이해를 거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당신에게는 또 다시 의문과, 이유 없이 향해진 타인의 분노와, 한숨만이 남습니다.
...다시 방으로 돌아갑시다. 이러다가는 정말로 해가 뜰 테니까요.
레오:(느릿느릿. 왔던 복도를 되짚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다. 넓디 넓은 공간에 맥 없는 발소리만 울렸다.)
나타샤:(수첩이 제 발 달려 도망갔을리는 없고, 대충 누가 가져가 읽게 되었을지에 대해서는 예상했다. 변수다. 끔찍한 변수. 문에 기대어 네 손에 들린 수첩을 한 번, 너를 한 번 보고.)
이제와서 거짓말을 치기도 그렇고... 어, 맞아. 정확히는 나만이 알던 때가 아니라 너도 전부 알고 있던 때부터 같이 썼어.
왜... 짝 맞고 좋잖아. 동질감 들고. (자조감이 드는 미소를 짓는다.)
레오:왜 계속 마왕을 자처한 거야. 내가 버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잊기 싫어서? 수첩에 대강 적혀있기는 했지만.
...나 못 미더웠나.
나타샤:당연한거 아니야? 너는 다 짊어질 것처럼 구는 주제에 누가 옆에 없으면 금방 울적해지는 놈이잖아. 거기다가 마왕 연기는 지독하게 못할 것 같고, 또 밥은 혼자서 엄청 축내느라 식량 조달도 귀찮아질 거고... ... (한참 늘어놓는다.)
그리고, 죽는 쪽이 기억을 잃는 이상. 다 알고 있어야 하는 건 나여야만 해. 나는 지금이 반대 상황이었다면 기분이 더러워서 널 바로 찔러버렸을 거니까.
레오:(으하하, 하고 짧게 웃었다. 내가 마왕이었던 순간은 항상 그렇게 끝났을 것 같긴 해.) ... 외로움은 너도 탈 것 같은데. 선대 마왕이 길렀다는 화원을 계속 가꾸었던 걸 보면... ...
첨탑에서 마을의 광경이 보였던 걸 보면.
나타샤:... (웃냐. 뭐가 좋다고. 짜증을 확 내려다가 그마저도 친근한 광경이 그리워질 것만 같아 검의 손잡이만 쥐고 입은 꾹 다물었다.) 나도 물론 평범한 인간이니까. 언젠가의 네가 기르고, 또 그 전의 내가 길렀고, 이후에도 그렇게 될 화원을 버리는 것도 좀 그렇잖아?
나도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지. 말했듯이 여기는 나 혼자밖에 없으니까. 그렇지만 널 죽이고 나서 매번 결심해, 결국 이 자리엔 나밖에 앉을 사람이 없다고.
그래서... 널 죽일 거야. 얌전히 죽어주지는 않겠지, 레오?
레오:... 응, 난 죽기 싫거든. 그렇다고 널 죽이고 싶지도 않고. ...우린 훌륭한 톱니바퀴라고 했지만... ... 그만 움직이고 싶은 것 같기도 해.
꼭 한 명이 죽어야만 하는 거야? 용사도, 마왕도... 결국 우린 그저 사람이었잖아. 사람이잖아.
...뭔가, 수첩을 읽게 된 지금의 내가 아니라, 그 전의 나 또한 비슷한 말을 했을 것 같은데.
... 그만 둘 수는 없는 걸까. 이거.
나타샤:물론 우리가 멈춘다고 싸그리 죽어버릴 제국인들이 불쌍한 건 아니야. 나라도 멈추고 싶지. 근데... 너랑 나는, 너무 힘들었잖아. 죽음이 쉬운 것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해서 이틀 정도 너 보겠다고 이십 년을 버티는데 언젠간 기계장치의 무대에서 내려오는 날이 오겠지, 싶어서 꾸역꾸역 견딘 건데...
이렇게 멈추기에는 억울해서... (눈을 살짝 감아 떠올린다. 매 순간을 기억하기엔 너무 녹슬어버렸지만, 네 죽음의 순간만큼은 생생하다. 뜨겁게 튀는 피, 인간의 살갗을 가르고 보는 네 표정... ... 다시 또 혼자 남았다는 기분. 그만하고 싶은 동시에 계속 해야만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너야 언제나 비슷했지. 얼빵해 빠져가지고는.
그거 알아? 밥도 매번 많이 먹어서 하루 종일 음식만 준비해야 할 때는 체력이 쭉 빠지지만 즐거워. 근데 너도 나도 둘 다 죽어버리면 우리가 한 것들은 뭐가 돼... 그게 싫어.
레오:... 세계가 붕괴된다고 했던가. 정말... ... 둘 모두가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안면을 쓱 쓸어내렸다. 이 세상이 멸망하는 것은 싫다. 죽음이 싫다. 마물에 찢기던 제 부모가 그리 될 운명이었다고 한들 광경은 무엇보다 처참한 비극이었기에. 그저 제가 이 모든 것 중 안도할 수 있는 한가지 사실은 너를 억지로 원망치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 네가 죽으면 넌 기억을 잃고, 난 지금부터의 기억을 간직하게 되겠지. ... 몇 번이었어? 내가 죽은 횟수.
못 미더운 용사... 아니, 사람이라서 미안. ...네게 짐을 지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 먼 과거의 내가 봤다면 꽤... 슬펐을지도. 지금도 좋지는 않거든. 흔적은 남아있는 걸까. 내 안에. (담담히 중얼거렸다. 고독보다 기억을 잃는 것이 싫어? 옅은 물음과 함께.)
무엇이 최선이며, 맞는 길인지 모르겠어. 전처럼 내가 죽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네 짐을 억지로 빼앗아 짊어지는 것이 맞을까. ...톱니바퀴의 이가 빠지면 안된다는 건 이해했어.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도.... ...
... 왜 우리여야 했을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나타샤:없어.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변하지 않는 확신이며 어떠한 수단도 없다. 오랜 시간을 살며 혼자서 서재에 틀어박혀 연구할 적에도 조금의 실마리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있었으면 진작 했겠지. 우리가 서로를 죽이지 않는 시간이 지체될수록 마물들은 마을을 덮어갈 테고.
... (네 말에 얼굴을 작게 찌뿌리며 하나, 둘... 하고 속으로 가늠해보지만 어느 지점에서 기억이 흐려지면서 더 이상 기억나지 않았다. 이래서 기록을 시작한건데 그 수첩을 네가 봐버렸으니... 네 손버릇처럼 이쪽도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고,) 모르겠어. 기억이 안 나. 그치만... 만약 내가 죽은 다음의 너는 혼자서, 이 넓은 마왕성 안에서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아닐 걸.
넌 지금의 나 없이는 안 돼. (이것 또한 확신한다.) 내가 가진 기억마저 없으면 우리의 시간들은 누가 증명해? 그렇기 떄문에, 이 세계는 나 없이는 안 돼. (오만에 가까운 확신을 또 다시 뱉고 침대 쪽으로 검을 끌며 척척 다가선다.)
무엇을 걱정해. 우리는 지금까지 하던 대로만 하면 돼. 작은 변수로 네가 과하게 알아버린 탓에 여기까지 왔지만, 우리는 원래 칼부림을 하고 있었어야 했으니까. 그게 세계의 운명이고. (바닥에 검을 콱, 박아놓고선 네 위로 슬금 올라탄다.) 내가 너무 답답하게 구는 것 같냐, 레오?
레오:(제게 성큼 다가와 저를 깔고 올라오는 푸른 이를 본다. 기억이 없는 제가 무어라 논할 것이 못 된다고 생각했다. 그저,) ...네가 괴롭지 않았으면 해.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덜 괴로웠으면 해. 내가 못 미덥다고 한들... 말대로라면 내팽겨치고 도망칠 겁쟁이는 아니라고 생각하잖아.
네가 가진 그 기억이 소중하고, 너 혼자만이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놓칠 수 없다면 이해할 수 있어. 납득하고, 순응하고... 지금까지 그래왔든 굴러갈 수 있단 말이지. 하지만... ... 네 선택이 나 때문이라면. 이 짐을 넘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면 그건 싫다.
너 한 번, 나 한 번이었던 거잖아. 공평하게.
... ... 잊어버릴 미안함과 죽고 싶지는 않다. 다음 생에서도 널 만나면 멍청하게 웃어버릴 것 같거든.
나타샤:(문득 체감한다. 이런 바보같고 멍청하고 솔직한 면 한 번 보겠다고 20년을 견디는구나. 또 그걸로 버티는구나. 속에서 괴로운 감정들이 솟구친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마왕은 너무 외로웠다... 고개를 숙여 파란 머리칼을 듬직한 어깨 위에 흘리고, 두 눈을 깊게 마주한다. 피할 수 없는 고독이 거기에 새겨져 있었다.) 모르기 때문에, 직접 느꼈던 기억이 없기 때문에 편하게 말하는 거라고는 생각 안 해? 감히 내 괴로움을 덜겠다는 이유로 더 큰 짐을 짊어지겠다고?
그 점이 싫어. 네가 쉬이 도망칠 겁쟁이는 아니라는게. 차라리 한 번도 못 견디고 도망칠 만한 인간이었으면 난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검을 들어 목을 베었겠지. 그런데 내가 너와 이렇게 필요없는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 이유가 뭐겠어! 다 너 때문이야. 멋대로 이해하고 납득하고 받아들여주니까... (그리고선 얼굴을 어깨에 묻는다. 흐느끼는 것처럼 떨었지만 어깨가 젖어들어가진 않았다.)
(벽에 가로막힌 듯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아래에서 들려온다.) ...너는 무엇이 최선이라고 생각해? 용사나 마왕으로써가 아닌, 레오와 나타샤의 결말이.
레오:... ... (제게 무너지며 기대오는, 제법 크고도 길쭉한 몸을 받아내듯 끌어안았다. 체온이 마냥 낯설지 않았다.) ...최선이 있는지 모르겠어. 그런게 있다면 망설임 없이 택했겠지. 나는 그저... ... 한 사람이 소외되고, 버려지고, 괴롭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그럴 바에야는 둘이 나아. 하나보다는 둘이... ...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못한 선택임을 안다. 그럼에도 저는 그런 인간이었기에.)
네게 괴로움이 아니라면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해. 멋대로 이해하는 것 맞아. ... ...텅 빈 삶을 반복하는 것보다 쥘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도 쥐고 싶다는 생각을 이제서야 하게 되었거든...
주제넘고 멍청한 용사는 좀 그렇지, 역시. (옅게 웃었다.)
나타샤:하나보다는, 둘이. (푸슬푸슬 헛웃음 비슷한 것을 뱉는다. 그것은 고여있던 숨에 가까웠다. 어느 생에서는 보자마자 덮쳤던 때도 있고, 냅다 끌어안았던 적도 있었는데 지금보다 따뜻했던 적은 없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언제나 둘이었지만 하나였고 괴로웠다...)
주제넘고 멍청한 용사 주제에. 감히 이 위대한 마왕의 괴로움을 나누겠다고. (텅 빈 삶. 그 단어로 스스로가 외면하고 있던 진실을 온전히 마주한다. 주어지지도 않는 보상 하나에 매달려 이 거지같은 삶을 연명해고 있었음을.)
나는... 바다가 보고 싶었어. 바다에 대한 책을 읽었는데, 이 주변은 온통 황무지고 가끔 숲이나 강이 보일 뿐이라서 실제로 상상이 안 되는거 있지.
나한테 바다를 보여줄 수 있겠어, 용사? 단 하루라도 바다를 볼 수 있게 된다면 날 죽여도 좋고, 그대로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살아도 좋아. 두 심장에 검을 박아넣고 끝을 맞이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레오:(한 손을 들어 물결치는 푸른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닮았다.) ... 바다 말이지. 많이 멀지는 않을 걸. 항구에 가면 뱃고동 소리도 있고, 비릿하고 짠 물냄새와, 소금기 섞인 바람도 불어와.
(부드러운 머리칼의 끝에 다달으자, 쥐었던 것들을 놓은 대신 네 손을 잡았다.) 마왕성 밖으로 나온 적이 있어? 없을 것 같은데... ...
... 나가자. 네게 보여주고 싶은 것도, 같이 가고 싶은 것들도 많지만... 전부 욕심낼 수 없다면 그 중 제일인 것 딱 하나는 탐내도 괜찮잖아.
다음 번에는 마왕성을 바닷가로 옮겨볼까... 할 수 있으려나. (농담처럼 옅게 웃었다. 좋아하는 곳이라면 찾아오는 길이 덜 고될지도 모르니까.)
나타샤:(가만히 상상하는 듯 잠시간 말이 없다. 비린 향은 네 피의 향이고, 짠 물냄새는 요리를 위한 소금물의 향이고, 그것이 불면 소금기 섞인 바람일 것이고, 뱃고동 소리는... 잘 모르겠다. 꿈지럭대다가 맞잡힌 손을 보고 눈썹을 늘어트린다.)
문 앞 까지는. 마왕이 된 이후로는 마왕성 바깥으로 나가면 안 돼. 실제로 주술이 걸려있거나 한 건 아니지만, 한 번 나가면 숲까지 가고 싶어지고 또 민가에 가고 싶어지니까. 한 발도 안 돼. 그런 거야. (여전히 고개를 묻고 있던 탓에 눈을 깜박일 때마다 옷자락에 사부작거리도록 속눈썹이 닿는다. 심장의 고동이 느껴질 것 같아서 집중한 상태로 응, 하고 긍정의 답을 뱉는다.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거절하기에는 그동안 너무, 너무, 너무, 정말, 괴롭도록 외로웠었다. 이 기회는 놓치면 또 다시 돌아오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결국 사명을 놓아버리고 네 손을 대신 잡는다.)
못 해. 뿔 수납이니 마물 조련이니 뭐니 했지만 다 거짓말이고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없어. 마왕성은 영원히 이 곳이야. 아무리 멍청하게 몸으로 다 해결하려는 너라도 바다 옆으로 성을 옮기는 짓은 못할걸! (몸을 뒤로 확 젖히면서 뒤늦게 깔깔 웃는다. 처음으로 완전히 후련해진 표정을 네게 비추었다. 이전에도, 그 전의 너에게도 보인 적 없는, 아주 오래간만의 얼굴.)
레오:... 뭐야. 뿔 없어? (조금 실망한 눈초리로 네 관자놀이를 살살 문질러본다. 이내 픽 웃어버렸지만.) 바다로 옮길 수 없는 건 아쉽네... 벽돌 하나씩 옮겨도 무리겠지. 새로 짓는 게 나을지도... (실현 가능성이 전무한 꿈 같은 이야기나 했다. 허리를 가볍게 안고,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좋은 터를 알아보러 얼른 가야겠어. ... 이젠 참지 않아도 되니까. 한 걸음 더, 두 걸음 더... 이런 고민 할 필요 없지? (너를 방 밖으로 먼저 이끌었다. 깜짝 놀라겠지. 바다를 보면. 네 머릿결도 그렇게 찬란히, 태양빛에 부서질테니까.)
(... 클레이모어는 챙겼을 테다. 꿈 같은 이야기 속에서도.)
나타샤:뭐야. 실망한 눈치다? 어? (관자놀이를 문질러보아도 그냥 가느다란 머리카락 위에서 맴돌 뿐이다. 손길이 간지러워 실실 웃다가 꿈 같은 이야기에 잠시 어울려주기로 마음먹었는지 얌전히 들리면서 말을 줄줄 이어간다.) 좀 규모가 작아지겠지만 뭐 어때. 여기 너어어무 넓어서 혼자서 청소하려면 10년이 휙휙 간다니까? 새로 짓는 마왕성에는 고급 침대도 구해두고, 더 넓은 서재에, 적당한 크기의 식탁도 두는 거야. (클레이모어를 챙기는 손을 뻔히 보았음에도 굳이 언급하지는 않고선 얌전히 안긴 상태다. 검도 들고 나도 충분히 들 만한 재량을 가진 것은 알겠으니 그 이후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지 뭐. 앞일만을 생각하는 것은 이제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가면 가장 먼저 맨발로 땅을 밟아볼거야. 그 다음에 소금기 어린 물을 쥐어보고, 너한테 뿌릴 거니까 용사의 민첩함으로 잘 피해보도록 해. (20년에 한 번 신느라 영 익숙하지 않은 하이힐을 꾸물꾸물 벗겨내 한 손에 들고 빈 손으로는 네 어깨를 통통 두드린다.) 안내해, 레오! 우리 이야기를 싫어하는 마물이 나타나면 네가 다 베어버리고 계속 가는 거야.
그리고 이야기의 스포일러는 별로 안 좋아하니까 나의 마지막을 어떻게 끝맺어줄지는 아직 결정하지도, 입 밖으로 뱉지도 마. (그의 염원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꿋꿋히 네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가 꾹 눌렀다가 뗀다.)
레오:그렇게 지루하고, 스포일러처럼 뻔해진 이야기를 싫어하면서 긴 시간을 어떻게 버틴 거래... (고개를 설설 흔들었다. 네 무게쯤은 거뜬하다는 듯 내려줄 생각 한 번 않고 뚜벅뚜벅 걸어간다. 마물은... 눈치가 있으면 빠져주겠지.)
민첩함 같은 거 잘 모르겠는데... 내 등 봤지. (뭘 그리 잘했다고 당당하다.) 좋아하는 책 있어? 새로 생길 서재에 구비해두자. 네가 좋아하는 것도... 내가 좋아하는 것도.
... 같이 살 집 준비하는 것 같아서 조금 부끄럽지만. (히죽, 웃으며 네 머리칼에 뺨을 슬쩍 부볐다. 아. 마왕성의 거대한 정문이다. 밖으로 나가면 어딘가 따스하고도 고독한 내부가 거짓말이라는 듯 시커멓고 암울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겠지.)
(그럼에도 그 마왕성을 등지고 계속해서 나아간다. 거대한, 시커먼 비석이 세워진 무덤보다는 반짝이는 모래알 속에 사그라드는 것이 행복일테다.)
나타샤:제법 괜찮고 재밌는 결말의 마지막 페이지가 있으리라 믿고 견뎠지. 그리고 내가 한 끈기 하걸랑. (내려달라는 말도 없고 무겁냐, 괜찮냐는 말도 없다. 네가 어떻게 누군가를 들어올리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아, 말 한 번 잘했다. 등이랑 옆구리랑 아주 난리가 났었던거 누가 치료한지 알아? 나야 나. 응? 어휴... 안 봐도 뻔하지, 제대로 피하지도 못하고 다 얻어맞았으니 그 꼴이 났던 것 아냐. (잔소리 줄줄~)
책은 됐어. 챙기기 시작하면 한둘만 챙기고 싶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거 다 들려면 네가 날 못 들지 않겠어? 냅둬. (편안하게 안겨진 자세 그대로 네 목에 두 팔을 안정적으로 두른 다음 쏟아지는 새 햇빛에 눈을 슬쩍 찌뿌린다. 생소한 모습이다. 창 밖이 아니라, 이렇게 바깥으로 나와본 것이 얼마만이지? 문득 세다 보니 울컥, 하고 그간 쌓인 외로움이 밀려와 흑의 눈동자를 어른거리고 만다. 네 품에 다시 얼굴을 묻고, 이 광활한 황야 너머의 어딘가를 갈망하며 숨을 들이쉬었다.)
...레오.
바깥으로 나오는 동안, 방바닥에 꽂혀있던 나타샤의 검이 떨어졌는지 멀리서 금속질의 소리가 바닥에 나뒹굽니다.
짧은 평생을 숱하게 무너지지 않게 세웠던 맹세는 저 검과 함께 바닥까지 추락하고 없습니다.
마왕도, 용사도 이 순간만큼은 우리에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동이 틉니다.
아침은 속절없이 밝아오고, 하늘은 속도 모르고 환합니다.
그 빛나는 하늘을 받들듯 안겨서, 마왕이 아닌 나타샤는 당신의 모습만을 눈에 담습니다.
눈꺼풀 안쪽에 화상처럼 남깁니다.
내 이 생 안에 머물 상처여.
생각해보면 당신과 나는 정해진 결말이라는게 없었는데.
둘 중 하나를 살해해도 끝나지 않는 영원이라면,
잠시만이라도 다 팽개칠 텝니다.
바다의 약속이 끝날 때까지는...
둘 다 아무런 말이 없던 순간, 나타샤가 당신의 이름과 함께 토해내는 숨이 묵직합니다.
나타샤:그래. 차라리 이렇게, 잠깐만이라도...
너랑 싸움이 아닌 무언가를, 다른 무언가를 해보고 싶었어.
세계의 평화도 사람들의 행복도 분명 당신에겐 외면할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의 영겁의 고통도, 나타샤의 외로움도 외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문득 웅크려 기도하던 나타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참혹 속에서 홀로 초라하게 손을 맞잡고 있던 그.
여태 우리는 얼마나 외롭고 괴로웠나요.
웃고 싶은 기분입니다.
왈칵 바보처럼 웃어버리고픈 기분입니다.
Happily, ever, after. 현실에는 없는 결말을 행복하게Happily, 그 하나만 남겨놓고서라도 지워냅니다.